<일대종사> 뒤늦은 감상, 무술수련자로서.


.
무술 수련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명확한 영화였다. 세간의 "모호하다"라는 평이 이해 안될 정도. 결국은 기예와 그 전승에 대한 이야기이다.

.
무술을 하다 보면 일종의 이기심이 드는 순간이 많다. 말하자면 내 성장만 신경쓰게 된다는 것이다. 후배 연습에 어울려주는 시간이 아깝다든가, 퍼뜩 깨달은 심득을 나만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든가, 스파링에서 승패를 가르려고 한다든가.

.
반면 절정의 기예를 홀로 가지고 있은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수련 내적으로 보면 내 상대가 되어주는 타인 없이 실력은 늘 수가 없고, 수련 외적으로 보면 다른 사람들과 의미를 나눌 수 없는 것에는 어떠한 가치도 없다.

.
그래서 무대가 20세기 초중반인 것이다. 왜냐하면 무술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총포로 대표되는 불의 힘에 권각과 도검곤창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영화 내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폭죽의 모티프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그것은 무술로는 저항할 수 없는 시대의 폭력(전쟁의 참화)이며 동시에 불타오르고 덧없이 사라져버리는 무술이라는 환영 그 자체다.

.
궁이의 마삼에 대한 복수는 일부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무협의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또한 무협의 이러한 서사는 항상 시대와 유리되어 있었다. 설령 냉병기와 무술이 전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시대를 다루어도 그렇다. 초기 무협에서 황실과 군대가 나올 때 묘사되는 그 "규칙 외"의 느낌, 이를테면 관군의 철 갑옷에 고전하는 무술고수들의 이미지가 있다. 그러면 왜 무림인들은 갑주를 입지 않는가("보물"로서 일부의 예외가 있다. 그러나 거꾸로 왜 갑주는 보물이어야만 걸칠 수 있는가?). 결국 무림인들은 자신들만의 철저한 규칙 하에서 자아를 겨루는 것이다. 그들은 생존을겨루지 않는다. 결과로서 생과 사의 갈림은 있을지언정. 그래서 절정의 무림고수라도 무림의 규칙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역사의 파도에 휩쓸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곽정은 몽고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소림사는 만주 병사들에 의해 짓밟혔다. 

.
이것이 武의 허망함이다. 무는 가치를 낳지 못하는 불임이며, 협은 사회적으로 공인될 수 없는 자기만족이다. 마삼 또한 만주국 설립에 동조한 친일파라는 사실로부터 武의 서사에 어떤 차이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의 자아는 무술가이기 때문이다. 궁이는 결혼하지 않고, 무술도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가 익힌 무술은 아버지 궁보삼이 남몰래 홀로 연마하던 팔괘장이었다. 재미있게도 팔괘장은 환관인 동해천이 창시한 무술이다. 그리고 청나라 최후의 황제 푸이가 수련한 것도 팔괘장이었다.

.
광대놀음이나 사자춤과는 다르다며 강변하는 엽문의 말에는 거꾸로 콤플렉스의 혐의가 보인다. 즉 무술가들은 온 자아를 무술에 걸고 있으나 외부인이 보기에 그것은 희한한 기예에 지나지 않는다(오늘도 미디어에서 다루는 무술이 차력 이상 되지 못하는 것을 보라). 작중 금루에 영웅들이 드나든다고 뽐내지만 결국 한량들이 기루에서 술 마시고 기녀를 끼고 경극을 보며 툭닥거리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궁이의 말년에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아편에 빠졌다, 혹은 무예에 심취했다는 소문이 있다." 아편과 무예가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
가치와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술의 허망함. 그 때문에 말년의 절정고수 궁보삼은 교류에 구애받는다. 전병을 사이에 둔 대련에서 엽문은 여전히 작은 세계에 갇힌 노년의 고수에게 "무술"이 아닌 "세상"을 운운하며 승리를 받아낸다. 그러나 그의 치기는 일본의 침략에 의해 유복했던 생활을 잃게 되고 난생 처음 "세상"의 풍파를 맞이하게 되면서 무너진다.

.
영화의 처음과 끝에 언급되는 테마인 수직과 수평은 그래서, 대사에서 말해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수직은 무술가로서 오롯한 것이다. 이것은 궁이이다. 수평은 홀로 선 기예를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엽문이다.

.
기예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는 데에서 의미는 생겨난다. 왕가위는 거기에 주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소룡이 있기 때문이다. 엽문에게 전달받은 기예로 이소룡은 무술권격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단순히 무술영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홍콩영화의 부흥까지도. 일대종사란 무술을 부흥시켜 크게 널리 알린 사람을 뜻한다. 홍콩과 홍콩영화의 적자인 왕가위는 엽문에서 이소룡으로 이어지는 "기예"의 전달에서 일종의 "스승"으로서 엽문을 느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영화인으로서, 홍콩인으로서 왕가위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
아무리 봐도 사족으로 보이는 일선천의 등장 이유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왕가위는 1996년부터 이 영화를 구상하면서 대륙과 홍콩, 대만의 허다한 무술가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며 그 계보를 쫓았다. 결과적으로 그가 매료된 무술은 영춘, 형의, 팔괘, 팔극의 4종이었다. 즉 왕가위는 팔극권을 찍고 싶어서 일선천을 만들어낸 것이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이름이 떨어지는 감독이었거나 연출 외에 제작까지 담당하지 않았더라면 일선천은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덧글

  • 잠꾸러기 2015/10/25 17:34 # 답글

    잘읽고 갑니다^^
    마지막에 언급된 무술4개는 제가 좋아하는 4종세트네요ㅋ
    현재는 친일반민족 무술을 배우고 있지만 기회가 되면 호감 가는 다른 기예도 습득해보고 싶네요.
  • 蒼雲 2015/10/25 17:38 #

    명문정파는 확실히 외부인이 봐도 느낌이 나는 것 같습니다ㅎㅎ(팔괘장은 마공이라고도 하지만)
    무술시작에는 늦은 나이가 없는 것 같아요. 요새 점점 그런 생각이 듭니다.
  • OrangeBelt 2015/10/26 04:48 #

    친일반민족 무술이라뇨... 빵 터졌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제 친구도 친미매국의 무술을 배우고 있...
    가라데는 오키나와에 근원을 두고 있으니 식민지하의 민중 무술이라 할수 있을까요...
  • 잠꾸러기 2015/10/26 09:04 #

    오랜지벨트/ 친일반민족(?) 계열 무술엔 공수도도 들어갈겁니다. 역사적 고찰같은건 필요없어요. 그냥 섬나라 물이 한번 들었으면 끝일듯ㅋㅋ
    태권도에도 친일드립하더군요.ㅎㅎ
  • 제트 리 2015/10/25 19:19 # 답글

    역시 일대종사는 무덕들이 봐야 하는 영화 로군
  • 蒼雲 2015/10/25 21:09 #

    감독부터가 무덕의 마음으로 만든듯ㅎㅎ
  • OrangeBelt 2015/10/26 04:48 #

    무덕을 위한
    무덕에 의한
    무덕을 추모하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흥행은 영.... ㅠㅠ
  • 셔플동맹 2015/11/05 00:19 # 답글

    팔극권의 영화적표현은 상당히 아쉽습니다.

    그냥 아쉽다는 말밖에 생각이 안나더라고요.

    일선천만 내용도 동떨어져있고. 영화적표현도 좀 부족하고..
  • Acid 2017/03/10 16:06 # 삭제 답글

    일대종사를 재밌게 봤지만,
    뭔가 정리되지 않는 느낌에(마치 똥을 덜 닦은 듯한)

    여러 리뷰를 찾아보았는데,수식어만 그럴싸했지, 딴 소리들 하는 느낌이었는데,
    蒼雲 님 리뷰보고, 정리가 되네요. 좋은 리뷰 잘봤습니다.
  • 蒼雲 2017/03/10 16:20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좋아하는 영화라서 이따금 다시 보게 되네요.
  • Acid 2017/03/10 17:50 # 삭제 답글

    저도 종종 다시 보곤 합니다. ^^

    개인적으로 '일대종사'를 보면서 궁금했던 점이 있는데, 혹시나 아실까 싶어서 적어보아요.

    "궁이"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고 한 시점부터, 파혼을 하고 후계자도 가질 수 없다고 하는데,
    이게 중국의 어떤 관례와 연관이 있는 건지요?

    댓글로 갑자기 여쭤볼려니 실례되는 것 같아, 고민하다가, 이 기회(?)에 마음 속 짐을 덜어보고자
    고민하다 여쭤봅니다.
  • 蒼雲 2017/03/11 17:25 #

    그런 관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ㅠ 그냥 가정을 꾸리고 세대를 재생산하고 그런 사회의 울타리가 아닌 무술가의 삶 (불임성)을 택했다는 서사적 장치 아닐까 싶습니다.
  • 행인 2017/07/16 08:58 # 삭제 답글

    대단히 재미있고, 인상깊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왕가위 영화세계의 팬이고, 홍콩반환을 기점으로 계속되어온 왕가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이 무술영화의 텍스트와의 맞닿는 지점이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추상적인 느낌으로만 남아있었는데, 차분하게 분석하신 내용을 읽다보니 좀더 명확하게 정리가 됐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蒼雲 2017/07/17 00:10 #

    이렇게 방치된 블로그에 일부러 리플도 남겨주시고, 또 잘 읽어주셨다니 무척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2017/07/18 15:49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리뷰 잘 보았습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군요.

    궁보삼과 엽문의 선문답을 덕분에 알고 보니 엽문도 궁이만큼은 아니더라도 왕가위의 사람이구나 싶네요.
    높이 올라갈수록 멀리 추락하는 법이니까요. 엽문의 옛날 기루의 박수 소리와 위풍당당했던 웃는 얼굴과 대비되어 소리 없이 아이처럼 울던 얼굴이 오래 남습니다. 양조위를 캐스팅한 것도 최고의 한 수였네요.

    아, 댓글을 보다가 아버지의 복수와 관례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는데요.짧은 지식이지만 그것은 아마 여성이 혼인을 하면 출가외인으로 취급하는 관례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시대의 관례에 따르면 혼인을 하면 남편의 가문에 속하게 되고 그 집의 사람이 되었지요. 실제로 마삼이 궁이의 첫 방문을 거절하면서 한 말도 궁가의 사람만이 궁가의 것을 가져갈 수 있다, 인데 이는 궁이는 혼인할 것이니 궁가의 사람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궁가의 것을 가져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궁이는 복수를 하려면 혼인하지 않고 궁가의 사람으로 남아야 하는 거죠. 또 후손을 남기지 않겠다는 것과 무술을 전하지 않겠다는 것 또한 그런 차원에서
    궁가의 무술이 궁씨가 아닌 다른 가문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되니 그런 선택을 한 것이지요. (실제로도 그래서 중국 무가는 딸에게는 무술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딸이 시집을 가면 전수한 무술이 남의 집 것이 되니까요.)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2017/07/18 15:53 # 삭제

    아, 광고는 절대 아닌데요.

    위 내용도 그렇고 영화부산의 일대종사 칼럼이 많이 참고가 되었는데, 일대종사의 서사 자체에 무술의 초식과 연관되는 부분도 있다더군요. 저는 무술에 문외한인지라 그렇지만 무술을 수련하시는 분이시라니 한번 보시면 재미있지 않을까 오지랖 부려봅니다. 같은 영화를 좋아하신다 하니 말이 많아졌네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