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이후의 세계와 테러리스트 서사-타노스의 경우>

 (스포 있음)


대체로 80년대 말을 기점으로 대중 장르 서사에 새로운 유형의 악당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 전까지의 악당들이 쾌락형(사악하고 이기적인 개인)이나 권력형(세계정복을 노리는 제국)으로 대별되었던 것과 비교해보자면, 이 악당들은 “신념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이들은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며, 나름의 정당성도 갖추고 있다. 다만 그들은 신념을 위해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른다는 점에서 악당이 된다. 그러면 왜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르나? 그들이 느낀 현실의 모순점을 기존의 방법론으로는 타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현실을 그대로 둔 채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대중서사는 반드시 대중의 현실인식을 반영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89년 <역사의 종말>을 펴내면서 자본주의가 인류의 마지막 종착점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2년 뒤 소련이 무너졌다. <역사의 종말>에 대해 준엄한 윤리적 비판을 가하거나 그 디테일의 허점을 논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지금의 우리가 자본주의 외의 현실을 상상할 수 있나? 물론 생태주의나 공동체주의를 비롯한 대안들이 제시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 대안들은 결국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들(독점욕, 소유욕, 권력욕, 과시욕)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의 필연적 실패를 답습할 수 밖에 없는 운명들이다.


결국 우리의 상상력은 자본주의가 품고 있는 다소간 필연적인 모순점을 어떻게 보완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로 귀결된다. 게임의 엔딩은 봤고, 그 다음은 패치가 이루어질 뿐인 것이다. 이 강고한 “현실”을 깨부수려면, 극단적인 방법론이 상상될 수 밖에 없으며 그 극단성은 필연적으로 대중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일상은 편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강신주는 생태성과 자연성의 회복을 위해 냉장고를 거부하자고 말한다. 이 주장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는지?


그래서 혁명가들은 이제 악당이 된다. 우리는 데스스타의 승무원이다. 하지만 이 데스스타에는 황제라는 “악의 유일한 원흉” 따위는 없고, 모두 그 거대한 구조물의 부속품이 되어 하루하루 살아갈 따름이다. 이 때 엑스윙을 타고 날아오는 루크 스카이워커는 파괴의 사도요 미친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현실에서도 이 악당들의 레퍼런스를 겪었다. 유나바머(Unabomber) 시오도어 카진스키는 고도화된 현대사회 속 개인이 자신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 잃어가는 것을 버틸 수 없었다. 그는 동물원에서의 안온한 삶보다 야생에서의 불안한 삶이 옳다고 믿었고 무차별 폭탄 배송에 자신의 메시지를 담았다. 옴 진리교의 아사하라 쇼코는 혁명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영성(靈性)을 통한 정신의 비약을 주장하며 도쿄 지하철역에 독가스를 풀었다. 아사하라는 소설 <공의 경계>의 악당 아라야 소렌의 직접적인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공의 경계>는 20세기 말 이후 주요한 대중장르가 된 도시판타지물의 한 전형인데, 도시판타지물은 주로 일상 속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는 사악한 존재를 찾아내 대결하는 구도를 띈다. 이 구도는 우리가 맞이한 “대테러리즘의 현실”과 그대로 상응한다.



평온한 일상세계를 무너뜨리려는 신념형 테러리스트, 그것이 지금 우리가 가장 현실성을 느낄 법한 악당의 원형이다. 타노스는 그 전형을 보여준다. 강인하고, 투철하며, 고뇌하는 구도자로서의 악당. 그는 전 세대의 영웅이다. 가장 가까운 레퍼런스라면 <왓치맨>의 오지만디아스가 있을 것이다. 이 둘은 결국 영웅들을 물리치고 목적을 성사시켰다는 점에서 특히 닮았다.



아마도 어벤저스의 다음 이야기에서는 타임스톤이 동원되고, 시간을 되돌리는 형태로 이번 편에서의 패배를 설욕(avenge)할 것이다. 세이브-로드를 넘나들며 가능한 현실(alternative reality)을 탐구하고, 그 개별 각각의 현실 바깥에서 메타적인 시선을 가지는 이 서사구조를 일본의 평론가들은 “게임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렀다.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서사구조는 21세기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현실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어벤저스4에서 이 주제들을 재미있게 다루기를 기대한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어벤저스 시리즈는 우리 세상을 사는 대중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텍스트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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